팔왕의 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팔왕의 난은 서진 무제가 황족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제후왕 제도를 시행한 이후, 황제의 권력 약화로 인해 황족들이 중앙 정부에 간섭하면서 발생한 내전이다. 291년부터 306년까지 이어진 이 난은 여남왕 사마량, 초왕 사마위, 조왕 사마륜 등 8명의 왕(팔왕)을 중심으로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황족 간의 군사적 충돌, 황후 가남풍의 권력 장악 시도, 조왕 사마륜의 찬탈 등 복잡한 권력 투쟁이 전개되었다. 팔왕의 난은 서진의 국력을 소모시키고, 이민족의 침입을 초래하여 서진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오호십육국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팔왕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지도 | |
| 개요 | |
| 명칭 | 팔왕의 난 |
| 로마자 표기 | pal wang-ui nan |
| 중국어 간체 | 八王之乱 |
| 중국어 정체 | 八王之亂 |
| 로마자 표기 | bā wáng zhī luàn |
| 발생 시기 | 291년 - 306년 |
| 장소 | 중국 전역 |
| 결과 | 서진 멸망 |
| 교전 세력 | |
| 교전 1 | 미상 |
| 교전 2 | 미상 |
| 지휘관 및 지도자 | |
| 지휘관 1 | 미상 |
| 지휘관 2 | 미상 |
| 전력 | |
| 전력 1 | 미상 |
| 전력 2 | 미상 |
| 사상자 및 손실 | |
| 사상자 1 | 미상 |
| 사상자 2 | 미상 |
2. 배경
무제는 위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자, 사마의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배경(왕족의 정치 참여 금지)을 바로잡고자 했다. 무제는 사마 씨족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삼촌, 사촌, 아들들에게 봉토를 나누어 주고, 군사 지휘권(5천 명~1천 5백 명)과 행정권, 세금 부과 및 중앙 관리 고용 권한을 부여했다.[3]
그러나 무제의 통치는 사마충의 발달 장애로 인해 계승 위기를 맞았다. 일부 신하는 무제의 동생 사마유를 황태자로 세우길 원했으나, 무제는 양염의 아들이자 가남풍의 남편인 사마충을 지지하며 전통적인 계승법을 고수했다. 무제는 사마충의 즉위 후 그의 손자 사마유에게 큰 잠재력을 보았기에 이러한 선택을 했다.
무제는 왕족들에게 권력을 부여하여 귀족 세력의 월권으로부터 후계자를 보호하고, 가족적 유대 관계로 왕조의 이익을 보호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사마충이 황제가 된 후, 왕족들은 이기심을 드러내며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얻기 위해 서로를 훼손하려 했다.
전한 초기에는 옛 육국의 후예나 공신을 제후왕으로 임명하고, 이후 황제 일족(종실·황족)을 제후왕으로 삼는 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오초칠국의 난 이후 제후왕은 중앙의 엄중한 감시를 받았고, 이 정책은 후한·위에서 강화되었다.
위(魏) 말기, 사마소는 일족을 각지에 봉하고 도독으로 임명하여 군권 일부를 부여했다. 진(晋)에서는 도독에 일족을 임명하여 반란을 막고 외부에 대비하려 했으나, 이는 팔왕의 난을 초래했다.
290년 5월 16일, 무제가 죽자 사마충은 회제로 즉위했다. 양준은 섭정이 되었고 양지는 황태후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양준은 권력 장악 시도와 조언을 무시하는 태도로 신하들에게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는 사마량을 암살하려다 실패했고, 사마량과 협력하라는 제안도 거절했다. 한편, 새 황후 가남풍은 양준과 황태후 때문에 국정에 대한 영향력이 미미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2. 1. 서진 건국과 제후왕 제도
사마염는 위의 멸망 원인이 된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했다. 이전 위 정권은 왕족의 정부 및 군사 직책 임명을 금지하고 봉토에서 살도록 했다. 이로 인해 강력한 귀족 가문의 지원을 받은 사마의는 큰 저항 없이 위 정부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 문제를 인식한 사마염은 사마 씨족의 권력 강화를 위해 삼촌, 사촌, 아들들에게 봉토를 나누어 주었다. 큰 봉토를 받은 자는 5천 명, 중간 봉토는 3천 명, 작은 봉토는 1천 5백 명의 군대를 거느릴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왕족과 공작은 봉토에 대한 행정권, 세금 부과 및 중앙 관리 고용 권한을 부여받았다.[3]무제의 통치는 후계자인 사마충의 발달 장애로 인해 계승 위기를 맞았다. 일부 신하는 능력 있는 무제의 동생 사마유를 황태자로 세우길 원했으나, 무제는 전통적인 계승법을 고수했다. 사마충은 무제의 첫 황후 양염의 아들이었고 가남풍과 결혼했기에 양씨와 가씨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사마충을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무제가 사마충 즉위 후 손자 사마유에게 큰 잠재력을 보았기 때문이다.
무제는 왕족에게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귀족 세력의 월권, 특히 사마충의 장애를 고려해 후계자를 보호하는 방패 역할을 의도했다. 그는 가족 구성원들이 가족적 유대감으로 협력하여 왕조의 이익을 보호할 것이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충이 황제가 된 후, 왕족들은 이기심을 드러내며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얻기 위해 서로를 훼손하려 했다.
전한 초기에는 옛 육국의 후예나 공신을 제후왕으로 임명하고, 이후 그들을 제거하고 황제 일족(종실·황족)을 제후왕으로 삼는 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오초칠국의 난 이후 종실 억제 정책이 채택되어 제후왕은 중앙에서 파견된 국상(후한)·감국열자(위) 등의 엄중한 감시를 받았고, 이 정책은 후한·위에서 강화되었다.
위(魏) 말기, 형 사마사의 뒤를 이어 진왕(晋王)이 된 사마소는 일족을 각지에 봉하고 위(魏) 시대의 유폐와 같은 대우를 대폭 개선했다. 또한 도독으로 임명하여 요지에 주둔시켜 오나 북방 민족에 대항하는 군권 일부를 부여했다. 도독은 위(魏) 시대에도 존재했지만, 강력한 군권 때문에 왕릉이나 무구검·제갈탄처럼 사마씨에 반기를 드는 자가 잇따랐다. 반면, 사마씨도 사마의가 도독으로서 촉의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 권력 장악의 발판을 마련한 직위였다. 진(晋)에서는 도독에 일족을 임명하여 반란을 막고 오(吳)나 북방 민족에 대비하려 했다. 그러나 일족에게 군권을 부여한 것이 팔왕의 난을 초래했다.
2. 2. 혜제 즉위와 권력 투쟁의 발단
서진 1대 황제 무제는 건국 후 황족의 권위와 국가의 힘을 과시하고 지방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아들, 조카 등 황족을 왕(王)으로 임명하여 군대와 조세권을 주고 해당 지방을 통치하게 했다(왕 지위의 세습도 허용). 그러나 무제 사후 황권이 약화되면서 각 지방의 제후왕들은 그들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앙정부에 간섭하는 도전 세력이 되어 정치 혼란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2대 황제 서진 혜제(사마충)는 어리석고 우둔한 제왕으로, 무제 사후 즉위하자마자 계모인 황태후 양씨(무제의 황후)가 정치에 관여하게 되면서 그녀의 친정인 양준 일가에게 대부분의 권력이 주어졌다. 이에 정치적 야심이 있는 황후 가씨는 실권을 잡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사실 무제는 황태자 사마충(미래 혜제)의 무능함에 실망해 황태자를 제왕 사마경으로 바꿀 것을 고려했는데, 이를 미리 알아챈 신하 가충(혜제의 장인)이 무제에게 황태자에 대한 능력을 테스트해 보도록 권유하고 미리 답을 황태자에게 알려줘 무제의 의심에서 벗어나 황태자 지위를 유지했으므로 가씨 집안이 혜제에게 기여한 바가 컸다고 볼 수 있으나, 권력에서 배제됨에 따라 양씨 일족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다.
2. 3. 가남풍의 음모와 권력 장악
무제는 오나라 평정 이후 정무를 소홀히 하고 주색(酒色)에 빠졌으며, 황후 양지의 아버지 양준이 정무를 처리했다. 양준은 자신을 지지하는 자들을 등용하고 많은 구신(舊臣)들을 멀리했으며, 동생 양요(楊珧), 양제(楊濟)와 함께 권세를 휘둘러 '천하삼양(天下三楊)'이라 불렸다. 양준은 재능 없이 외척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잡아 관료들의 미움을 샀다.[1]289년 11월, 무제가 병에 걸리자 양준과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에게 유지를 맡기려 했으나, 양지는 무제의 유조(遺詔)를 '양준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내용으로 바꾸었다. 290년 3월, 무제가 죽고 황태자 사마충(혜제)가 즉위하자 양준의 권세는 더욱 막강해졌으나, 실정을 거듭하고 충신의 간언을 듣지 않아 원망의 소리가 커졌다.[1]
290년 5월 16일, 무제가 죽자 사마중은 회제로 즉위했다. 양준은 섭정이 되었고 양지는 황태후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양준은 권력 장악 시도와 조언을 무시하는 태도로 신하들에게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는 사마량을 암살하려다 실패했고, 사마량과 협력하라는 제안도 거절했다. 한편, 새 황후 가남풍은 양준과 황태후 때문에 국정에 대한 영향력이 미미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3. 전개
291년 황후 가씨는 여남왕 사마량과 초왕 사마위를 끌어들여 양준(楊駿)을 제거하려 했다. 사마위는 군사를 이끌고 수도 낙양에 들어와 황제의 칙서를 위조하여 양준과 그 일족 3,000명을 죽이고, 양태후는 황궁에 유폐되어 굶어 죽었다.[1]
권력은 연장자인 사마량에게 돌아갔으나, 가황후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미미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이에 가씨는 친위대장 사마위와 결탁하여 황제의 칙령을 위조, 사마량을 반역죄로 몰아 공격했고, 군사 기반이 취약했던 사마량은 자살했다. 사마량 제거 후, 사마위가 주저하는 사이 가황후는 사마위가 단독으로 칙령을 위조해 사마량을 살해했다고 소문을 퍼뜨려 정치적 입지를 무너뜨리고 체포, 처형했다.[1]
이후 정적이 없어진 가씨는 가충 등 일족과 함께 권력을 독점했다. 혜제와 가황후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고, 다른 부인에게서 낳은 황태자 사마휼이 있었다. 가씨는 사마휼의 재능에 위기감을 느껴 제거하려 했다. 300년 가씨는 사마휼에게 모반 누명을 씌워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살해했다.[6]
이에 조왕 사마륜(혜제의 대숙부)은 제왕 사마경(혜제의 종제)과 공모하여 칙서를 위조, 군사를 일으켜 황태자 살해 죄를 물어 가씨와 그 일족을 처형했다. 301년 사마륜은 혜제를 유폐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했다.[7]
사마륜에게 권력이 집중되자, 사마경은 장사왕 사마애, 성도왕 사마영(이상 혜제의 동생) 및 하간왕 사마옹(사마충의 조부 사마의의 조카 아들)과 공모하여 군사를 일으켜 사마륜을 죽였다.[6] 혜제 복위 후 정치 실권을 장악한 사마경은 함께 궐기한 동지들을 배제하고 권력을 독점, 황태자도 독단으로 결정했다. 이에 사마애, 사마영, 사마옹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사마경을 살해했다.[7]
사마경 사후 국정 운영권을 놓고 사마애 등 3인간 다툼이 벌어져 무력 충돌이 발생, 사마애는 사마영과 사마옹에게 공격당해 죽었다. 사마영이 황태자이자 승상으로서 정치를 맡게 되었으나, 낙양에 있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사마영은 사마옹의 부하 장방에게 낙양을 통치하게 하였다.
사마영이 독자적으로 권력을 전횡하려 하자, 동해왕 사마월과 혜제의 막내동생 예장왕 사마치가 반기를 들었다. 사마월은 흉노와 선비 등 이민족 용병을 고용하여 사마영을 황태자 자리에서 끌어내렸다.[1]
306년 사마월은 낙양을 수호하던 장방과 사마옹을 공격하여 강화를 원했던 사마옹을 체포하고, 사마영과 사마옹을 살해했다. 사마월은 혜제의 뒤를 이어 사마치를 회제로 옹립하고 자신은 그를 보좌하였다. 이로써 팔왕의 난은 종결되었다.[1]
| 왕자 | 작위 | 생애 |
|---|---|---|
| 사마량(司馬亮) | 뤄난 문성왕(文成王) | ?–291년 7월 |
| 사마위(司馬威) | 추 인왕(殷王) | 271–291년 7월 |
| 사마륜(司馬倫) | 자오 왕(王) | ?–301년 6월 |
| 사마종(司馬瓊) | 취 무민왕(武敏王) | ?–303년 1월 |
| 사마애(司馬艾) (혹은 사마의(司馬乂)) | 창사(長沙) 이왕(李王) | 277–304년 3월 |
| 사마영(司馬穎) | 청두(成都) 왕(王) | 279–306 |
| 사마용(司馬雍) | 허젠 왕(王) | ?–307년 1월 |
| 사마월(司馬越) | 동해 소현왕(孝獻王) | ?–311년 4월 |
주목할 만한 다른 인물들로는 진 회제, 회제의 첫 섭정 양준(楊駿), 양지(楊芷) 황태후, 가남풍(賈南風) 황후, 그리고 고위 관료 위관(魏管)이 있다.[2]
3. 1. 여남왕 사마량 (291년)
황후 가씨는 여남왕 사마량과 초왕 사마위를 회유하여 도움을 청했다. 초왕 사마위는 군사를 이끌고 수도 낙양에 쳐들어왔고, 황제의 칙서를 위조하여 양준을 반역죄로 몰아 양준과 그 일족(약 3,000명)을 죽였다. 이때 태후 양씨는 황궁에 유폐되어 굶어 죽었다.[1]이후 권력은 연장자인 여남왕 사마량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가황후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미미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1]
가씨는 당시 친위대장인 초왕 사마위와 결탁하여 황제의 칙령을 위조해 사마량을 반역죄로 몰아 공격했다. 사마위는 양준 제거에 큰 공을 세워 중앙 정부 진출을 희망했으나, 사마량이 그를 지방으로 철군시키려 압력을 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군사 기반이 취약했던 사마량은 궁지에 몰려 자살했다.[1]
291년 5월 4일, 사마량과 위관이 새로운 회제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권력을 잡은 사마량은 지지를 얻기 위해 약 1,081명에게 새로운 임명과 작위를 자유롭게 나눠주며 권력을 행사했다. 동시에 가황후는 친척과 동맹들을 요직에 배치하기 시작했다.[2]
사마량과 위관은 사마위를 경계했다. 양씨 일족 패배에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마위는 폭력적인 성격으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마위의 군사력을 박탈하고 경주의 봉토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사마위는 가황후와 공모하여 그들을 폐위시키려 했다. 사마위는 그들이 가황후를 몰아낼 계획이라고 가황후에게 주장했다. 곧 가황후는 사마량과 위관을 제거하라는 황제의 칙령을 내렸다. 그러나 사마위는 원래 칙령에 불만을 품었다. 자신이 군대를 일으켜야 하는 왕족들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황후 몰래 사마위는 자신을 모든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작전에 대한 전권을 부여하는 칙령을 위조했다. 7월 26일, 그는 부하와 병사들을 보내 낙양에서 사마량과 위관을 체포했다. 두 사람은 저항하지 않았고 처형되었다.[2]
3. 2. 초왕 사마위 (291년)
사마량 제거 후 권력 장악 기회를 잡은 사마위가 주저하던 이틀 동안 황후 가남풍(가황후)은 권력 장악에 방해가 되는 사마위를 제거하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가황후는 사마위가 단독으로 황제의 칙령을 위조해 사마량을 살해했다고 소문을 퍼뜨려 그의 정치적 입지를 무너뜨렸다.[1]사마량이 죽은 지 하루 만에 가황후는 군대를 파견하여 사마위를 공격하고 그의 군인들 사이에 칙령의 진위 여부에 대한 의혹을 퍼뜨렸다. 결국 사마위는 추종자들에게 버림받고 체포되어 처형되었다.[1] 그를 지원했던 그의 친형인 사마애는 벌로 창산왕(長山王)이라는 낮은 작위로 강등되었다.[1]
3. 3. 가씨 일족의 전횡 (291년 - 300년)
사마휼 제거 후 권력을 장악한 황후 가씨는 가충 등 그녀의 일족과 함께 권력을 독점하였다. 혜제와 황후 가씨에게서는 자녀가 없었고 다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황태자 사마휼이 있었다. 가씨는 사마휼의 재능에 위기감을 느끼고 제거하려 하고 있었다.[6]가씨의 야심을 느낀 사마휼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어리석음을 가장했다. 궁궐에 노점을 열 정도로 노력했으나, 299년 가씨에 의해 모반 누명을 쓰고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되고 300년 결국 가씨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에 사마륜은 사마경과 공모하여 칙서를 위조해 군사를 일으켜 황태자 살해 죄를 물어 가씨와 그의 일족을 처형하였고, 301년 사마륜은 혜제를 유폐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했다.
사마륜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사마경은 사마애, 사마영 및 사마옹과 공모하여 군사를 일으켜 사마륜을 죽였다.[6] 가황후의 사치스러운 행실과 폭정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는 10년이 끝날 무렵 불만을 표출하는 씨앗이 되었다.[6]
3. 4. 조왕 사마륜의 반란 (300년 - 301년)
300년, 조왕 사마륜(혜제의 대숙부)은 제왕 사마경(혜제의 종제)과 공모하여 칙서를 위조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황태자 사마휼 살해 죄를 물어 가씨와 그 일족을 처형했다.[7] 며칠 후, 사마륜은 위조된 조서를 내리고, 가남풍을 자결하게 했다.[8] 301년 사마륜은 혜제를 유폐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했다.사마륜은 진나라 건국 당시의 선례를 따라 왕위를 찬탈할 음모를 꾸몄다. 그는 가족과 동맹들에게 높은 관직과 귀족 작위를 수여하고, 사마휼에게 사후 시호를 추증하며 유명 인사들을 등용하여 민심을 얻으려 했다.
사마륜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사마경은 장사왕 사마애, 성도왕 사마영(이상 혜제의 동생) 및 하간왕 사마옹(사마충의 조부 사마의의 조카 아들)과 공모하여 군사를 일으켜 사마륜을 죽였다.
3. 5. 제왕 사마경의 집권과 피살 (301년 - 302년)
사마경은 혜제가 복위한 후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고, 함께 거병했던 동지들을 배제하고 권력을 독점하였다. 그는 황태자도 독단적으로 결정했다.[7] 이에 사마애, 사마영, 사마옹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사마경을 살해했다.자애황후는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었던 황태자 사마유(Sima Yu)가 즉위하면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300년 초, 그녀는 사마유에게 술을 먹이고 취하게 한 뒤, 혜제가 자신의 뜻에 따라 퇴위해야 한다는 내용 등을 적은 글을 베끼도록 속여서 체포했다. 자애황후는 그 글을 혜제에게 보여주었고, 혜제는 사마유를 가택연금에 처했다.[7]
당시 황태자의 스승이었던 사마륜(Sima Lun)은 낙양에 있을 때 자애황후의 측근이었다. 그는 수도에서 우군 장군으로서 군대를 지휘했으며, "탐욕스럽고 불성실하며", "단순하고 어리석다"는 평판을 받았고, 오직 손수의 조언만 따랐다. 사마유가 체포되자 많은 관리들이 분노했고, 그중 일부는 자애황후를 타도하기 위해 사마륜에게 군사력을 요청했다.
사마륜은 오랫동안 황후를 배신하고 싶어했지만, 손수는 사마유가 제거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설득했다. 손수는 사마륜이 황후에게 충성한다는 평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사마유의 즉위로 이어질 것이고, 사마유는 사마륜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마륜의 부추김으로 황후는 사마유를 암살했다. 그 후 사마륜은 혜제가 발행한 것으로 위장한 칙서를 공개하여 황후의 제거를 명령했다. 300년 5월 7일, 그는 자애황후를 체포하여 가택연금에 처한 뒤, 금가루가 든 술을 마시게 하여 자살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또한 자미, 장화, 배위를 포함한 그녀의 많은 추종자들을 처형했다.
가씨 일족을 숙청한 사마륜은 상국(相國)의 지위에 오르며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우선 인심을 얻고 혜제를 보필하는 척했지만, 점차 권력 독점을 꾀하며 찬탈의 야망을 품었다. 하지만 그는 재능이 부족하고 지략이 없었기에 실제로는 측근 손수가 백관을 움직였다. 그 때문에 여론은 점차 사마륜이 아닌 손수에게로 향했고, 사마륜의 구심력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회남왕 사마윤(司馬允)(혜제의 동생)은 사마륜이 혜제를 멸시하는 행동에 불만을 품고, 그를 배척하려고 비밀리에 결기병을 양성했다. 그러나 사마륜은 이를 미리 알아채고 그의 동향을 매우 경계했다.
301년 1월, 손수는 위조된 조서로 사마윤을 반역자로 몰았지만, 사마윤은 선제적으로 회남병과 중호군의 병사들을 이끌고 사마륜의 반역을 선포하며 상국부를 공격했다. 사마륜은 저항했지만 사마윤에게 연패를 당하며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사마윤은 비 오듯이 궁시를 퍼부었고, 사마륜의 부하들은 도망치다 나무 아래에 숨었는데, 모든 나무에 수백 개의 화살이 박힐 정도였다. 궁중에 있던 중서령 진준(陳準)은 사마윤을 지원하려고 백호기(진나라 황제의 군사 지휘 깃발)를 사마독호 복윤(伏胤)에게 주어 사마윤의 진영으로 보냈다. 그러나 복윤은 사실 사마륜과 내통하고 있었고, 사마윤의 진영에 가서 그를 맞이한 뒤 살해했다. 이로써 사마윤의 군대는 와해되었고, 반란은 쉽게 진압되었다. 이 사건 이후, 사마륜은 혜제에게 구석(九錫)을 하사받고 찬탈 준비를 진행했다.
3. 6. 장사왕 사마애의 집권과 피살 (303년 - 304년)
301년, 사마륜이 제위를 찬탈하고 황제에 오르자, 신하들을 회유하기 위해 관직과 작위를 남발했다. 이로 인해 국고가 부족해지고, 측근 손수가 정사를 좌지우지하면서 조령(詔令)이 자주 바뀌는 등 낙양(洛陽) 조정은 크게 혼란스러웠다.[1] 사마경 사후 국정 운영권을 놓고 사마애 등 3인간 다툼이 벌어져 무력 충돌이 발생하면서 사마애는 사마영과 사마옹에게 공격당해 죽고 말았다.3. 7. 성도왕 사마영과 하간왕 사마옹의 대립 (304년 - 306년)
사마륜은 회제의 섭정을 맡았지만, 실제 권력은 대부분 손수(진)에게 위임되었다. 사마륜과 손수는 진나라 건국 당시의 선례를 따라 왕위를 찬탈할 음모를 꾸몄다. 이들은 가족과 동맹들에게 높은 관직과 귀족 작위를 수여하고, 사마유에게 사후 시호를 추증하며 유명 인사들을 등용하여 민심을 얻으려 했다. 손수의 먼 친척인 양현용이 새로운 황후로 책봉되었다.[8]300년 가을, 회남왕 사마윤이 사마륜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사마륜의 추종자가 사마윤을 죽여 반란을 종식시켰다.[8] 이 반란은 사마륜과 손수에게 조정의 라이벌과 반대파들을 제거할 구실을 제공했다. 한편, 기왕 사마종은 사마륜 정권 하에서 자신이 받은 자리에 불만을 품고 숙창으로 좌천되었다.
사마윤의 반란 후, 사마륜은 구여(九錫)를 받았다. 이듬해 그는 자신의 아버지 사마의의 영혼이 자신에게 서궁(西宮), 즉 회제의 거처로 이사하라고 명령했다고 주장했다. 그런 다음 회제의 자진 퇴위를 명시한 칙령을 위조하여 301년 2월 3일에 왕위를 찬탈했다.
사마륜의 섭정 기간 동안, 익주(중국 남서부)의 감찰관이자 가황후의 친척인 조신(진)이 반란을 일으켰다. 301년 초, 그의 반란은 그의 부하이자 파-디 난민 지도자인 리터가 그를 배신하고 성도에서 축출하면서 진압되었다.
당시 제왕 사마준(司馬冏), 성도왕 사마영(司馬穎), 하간왕 사마옹(司馬顒)은 각각 강병을 거느리고 지방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사마륜은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관작을 주면서도 자신의 신하들을 보내 감시했다.
301년 3월, 사마준은 사마륜의 신하를 살해하고, 하욱(何勗), 동애(董艾) 등과 함께 거병하여, 사마영, 사마옹, 상산왕 사마예(司馬乂), 신야공 사마흠(司馬歆)에게 협력을 호소했다. 사마영, 사마예, 사마흠은 이에 호응하였고, 사마옹은 처음에는 사마륜을 돕다가 사마준이 우세해지자 배신하였다.
사마륜은 사마준 등의 북상을 막기 위해 군사를 남하시켰다. 사마준 토벌군은 양적(陽翟), 영음(潁陰)에서 연승했으나, 점차 영수(潁水)를 사이에 두고 교착상태에 빠졌다. 손회(孫會), 사의(士猗), 허초(許超)는 황교(黃橋)에서 사마영군을 크게 이겼으나, 내분과 방심으로 사마영의 기습을 받아 탁수(湨水)에서 대패하였다. 이로써 사마영은 황하를 건너 낙양으로 압박해 들어왔다.
301년 4월, 낙양의 백관과 제장들은 사마륜의 패망을 확신하고 사마륜과 손수를 살해할 기회를 엿보았다. 사마영이 낙양에 압박해 오자, 왕여(王輿)와 광릉공 사마준(司馬漼)은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향하여 손수 등을 처형하고 낙양을 제압했다. 왕여는 사마륜에게 회제를 복위시키는 조서를 쓰도록 강요하고 금용성(金墉城)으로 송환했으며, 회제를 맞이하였다. 수일 후, 사마륜은 금가루 술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사마륜의 죽음을 듣고 사마준과 대치하던 장홍 등은 항복하였고, 사마륜에 의해 등용되었던 백관은 파면되었다. 사마준 등이 거병하여 사마륜이 패망할 때까지 60여 일 동안 10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3. 8. 동해왕 사마월의 집권과 몰락 (306년 - 311년)
306년 사마월은 흉노와 선비 등 이민족 용병을 고용하여 사마영을 황태자 자리에서 끌어내렸다.[1] 사마월은 낙양을 수호하던 장방과 사마옹을 공격하여 강화를 원했던 사마옹을 체포하고, 사마영과 사마옹을 살해했다.[1] 이후 사마월은 혜제의 뒤를 이어 사마치를 회제로 옹립하고, 자신은 그를 보좌하였다.[1] 가씨에 의해 양씨 추방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팔왕의 난은 이로써 종결되었다.[1]4. 결과 및 영향
팔왕의 난은 각 왕들이 군사력 강화를 위해 주변의 이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면서 서진의 약점을 노출시켰다. 이민족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는 야망을 품게 되었고, 잦은 전투로 인해 국가 체제가 크게 약화되었다.
304년 흉노족이 세운 한나라(훗날의 전조)의 유총이 낙양을 점령하고 (영가의 난) 민제를 살해하면서 서진은 멸망했다. 이는 북방 이민족들의 침입을 촉발시켜 화북지방을 오호십육국 시대라는 거대한 전장으로 변모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1]
이처럼 권력을 둘러싼 왕족 간의 다툼은 극심한 혼란을 야기했고, 결국 서진 멸망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이 난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왕족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에서 권력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4. 1. 서진의 쇠퇴와 멸망
팔왕의 난 당시 각 왕들은 군사력 강화를 위해 주변의 이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전장에 투입했다. 이민족들은 서진의 무력함과 약세를 느끼고, 제각기 독립에 대한 야심을 갖게 되었으며, 또한 많은 전투로 인해 많은 인재와 무장들이 죽어 국가 체제가 크게 약화되고 큰 혼란을 빚게 되었다.304년 흉노가 세운 국가인 한나라(훗날의 전조)의 황제 유총이 서진의 수도 낙양을 점령하여(영가의 난) 민제를 죽임으로서 서진은 멸망하였다.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북방 이민족들이 침입해 오면서 화북지방은 오호십육국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1]
팔왕의 난 당시, 여러 왕들은 이민족 용병들을 전장에 투입했다. 견고해 보였던 서진의 급격한 쇠퇴는 내란에 참여한 이민족들에게 독립에 대한 야망을 심어주었다.[2] 결국, 이는 304년 유연의 한(前趙) 건국으로 이어졌고, 중국 전토를 휩쓰는 내란(영가의 난)으로 발전하였다.[3]
회제와 사마월의 대립으로 회제는 사마월을 토벌하려 했으나, 311년 3월, 도망 중 사마월이 병사하였다.[4] 석륵은 사마월 사후 서진 군대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그 장병 10만 명 이상을 살육하였다. 이로써 서진은 저항력과 통치력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3개월 후인 6월에 낙양은 함락되었다. 회제는 평양(현재 산서성(山西省)임분시(臨汾市)요도구(堯都区))으로 압송된 후 313년 1월에 처형되었고, 회제의 조카인 민제가 장안(長安)에서 옹립되었지만, 장안 주변만을 지배하는 지방 정권에 불과했고, 전국적인 정권이었던 서진은 낙양 함락으로 사실상 멸망하였다.[5]
316년 11월, 민제는 유요의 공격을 받아 항복하고, 317년 12월에 살해되어 서진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이렇게 하여 시대는 오호십육국 시대로 접어들었다.[6]
사마의의 넷째 아들인 사마주의 손자인 랑야왕 사마뢰는 팔왕의 난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7] 사마월과 사마영의 다툼이 혼란스러워지자 봉국 랑야로 돌아와 강남 건업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진 멸망 후, 강남에 있던 사마뢰가 새로운 황제로 옹립되었다(동진(東晋)).[8]
한편, 사마모의 아들 사마보는 장안 서쪽의 상규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진 멸망 후, 스스로 진왕(晉王)을 칭하며 황제에 즉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320년 부하에게 살해되어 그 세력은 붕괴되었고, 화북(華北)의 진 황족은 사실상 소멸하였다.[9]
4. 2. 오호십육국 시대의 개막
팔왕의 난 당시 각 왕들은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주변의 이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전장에 투입했다. 이민족들은 서진의 무력함과 약세를 느끼고, 제각기 독립에 대한 야망을 갖게 되었으며, 또한 많은 전투로 인해 많은 인재와 무장들이 죽어 국가 체제가 크게 약화되고 큰 혼란을 빚게 되었다.[10]304년 흉노족이 세운 한나라(훗날의 전조)의 유총이 서진의 수도 낙양을 점령하여(영가의 난) 민제를 죽임으로써 서진은 멸망하였다.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북방 이민족들이 침입해 오면서 화북지방은 오호십육국 시대로 접어들게 되고 거대한 전장터로 발전하게 되었다. [10]
이러한 혼란 속에서 311년 영가의 난으로 낙양이 함락되고 회제가 사로잡히면서 서진은 사실상 멸망했다. 민제가 장안에서 옹립되었으나, 이 정권은 지방 정권에 불과했고, 316년 민제가 한에 항복하면서 서진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이후 시대는 오호십육국 시대로 접어들었다.
4. 3. 교훈
팔왕의 난은 서진 왕조의 내분으로, 권력을 둘러싼 왕족 간의 다툼이 극심한 혼란을 야기했다. 이 난은 결국 서진의 멸망을 초래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으며, 참여했던 대부분의 왕족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에서 권력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5. 주요 인물
진 회제, 회제의 첫 섭정 양준(楊駿), 양지(楊芷) 황태후, 가남풍(賈南風) 황후, 고위 관료 위관(魏管) 등이 팔왕의 난 시기에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2] 왕들의 봉토는 그들의 활동 근거지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사마영(司馬穎)은 청두(成都) 왕이었지만 주로 예에서 활동했고, 허젠 왕 사마옹(司馬顒)은 주로 장안(長安)에 머물렀다. 사마월(司馬越)만이 자신의 봉토인 동해를 근거지로 활용했다.[2]
5. 1. 팔왕
| 왕자 | 작위 | 생애 |
|---|---|---|
| 사마량(司馬亮) | 뤄난 문성왕(文成王) | ? ~ 291년 7월 |
| 사마위(司馬威) | 추 인왕(殷王) | 271년 ~ 291년 7월 |
| 사마륜(司馬倫) | 자오 왕(王) | ? ~ 301년 6월 |
| 사마경(司馬冏) | 취 무민왕(武敏王) | ? ~ 302년 |
| 사마애(司馬乂) | 창사(長沙) 이왕(李王) | 277년 ~ 304년 3월 |
| 사마영(司馬穎) | 청두(成都) 왕(王) | 279년 ~ 306년 |
| 사마옹(司馬顒) | 허젠 왕(王) | ? ~ 307년 1월 |
| 사마월(司馬越) | 동해 소현왕(孝獻王) | ? ~ 311년 4월 |
- 여남왕 '''사마량(司馬亮)'''(? ~ 291년): 사마의(司馬懿)의 셋째 아들. 사마사(司馬師)와 사마소(司馬昭)의 이복 동생.
- 초왕 '''사마위(司馬瑋)'''(271년 ~ 291년): 사마염(司馬炎)의 여섯째 아들. 혜제(惠帝)의 이복 동생.
- 조왕 '''사마륜(司馬倫)'''(? ~ 301년): 사마의(司馬懿)의 아홉째 아들. 사마량(司馬亮)의 이복 동생.
- 제왕 '''사마경(司馬冏)'''(? ~ 302년): 사마염(司馬炎)의 친동생 사마유(司馬攸)의 아들.
- 장사왕 '''사마애(司馬乂)'''(277년 ~ 304년): 사마염(司馬炎)의 열일곱째 아들. 사마위(司馬瑋)의 친동생.
- 성도왕 '''사마영(司馬穎)'''(279년 ~ 306년): 사마염(司馬炎)의 열아홉째 아들. 사마애(司馬乂)의 이복 동생.
- 하간왕 '''사마옹(司馬顒)'''(? ~ 306년): 사마의(司馬懿)의 동생 사마부(司馬孚)의 손자.
- 동해왕 '''사마월(司馬越)'''(? ~ 311년): 사마의(司馬懿)의 동생 사마馗의 손자.
'팔왕(八王)'이라는 명칭은 성도왕 사마영(司馬穎)을 섬겼던 노집(盧綝)(노지(盧志)의 조카)이 저술한 『팔왕고사』(현재는 전하지 않음)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5. 2. 기타 주요 인물
진 회제, 회제의 첫 섭정 양준(楊駿), 양지(楊芷) 황태후, 가남풍(賈南風) 황후, 고위 관료 위관(魏管) 등이 팔왕의 난 시기에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2]6. 가계도
wikitext
| style="text-align:left;" | |

7. 팔왕의 난 이후
팔왕의 난 때 각 왕들은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주변의 이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전장에 투입했다. 이민족들은 서진의 무력함과 약세를 느끼고, 제각기 독립에 대한 야심을 갖게 되었으며, 많은 전투로 인해 많은 인재와 무장들이 죽어 국가 체제가 크게 약화되고 큰 혼란을 빚게 되었다.[1]
304년 흉노가 세운 국가인 한나라(훗날의 전조)의 황제 유총이 서진의 수도 낙양을 점령하여(영가의 난) 민제를 죽임으로써 서진은 멸망하였다.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북방 이민족들이 침입해 오면서 화북지방은 오호십육국 시대로 접어들게 되고 거대한 전장터로 발전하게 되었다.[1]
사마월은 309년 낙양으로 돌아와 궁정 장악을 강화했다. 그는 3,000명의 기갑병을 보내 진 회제의 총애를 받는 신하들을 체포하고 처형했다. 그리고 이전 쿠데타에 여러 번 참여했던 궁궐 경비병들을 해산시키고 자신의 봉토 출신 병사들로 교체했다. 이 무렵 낙양은 치명적인 기근에 시달렸고 한나라의 두 차례 공격을 받았다. 낙양이 너무 노출되었다고 판단한 사마월은 진 회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만 명의 황제군을 이끌고 향현(項縣; 현재 하남성 신구현)에 진을 치고 한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원정을 시작했다. 황제는 사마월이 직접 선택한 신뢰할 만한 신하들의 감시 아래 수도에 남겨졌다.
이 결정은 그들의 관계에 있어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는데, 회제가 사마월을 폐위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마월의 2인자 구희와 접촉했는데, 구희 또한 왕자와 불화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결국 발각되었다. 사마월은 구희를 공격하려 했지만, 스트레스로 인해 병들어 311년 4월 23일에 죽었다. 이제 10만 명으로 늘어난 황제군은 어떻게 할지 몰랐다. 그들은 서둘러 사마월의 신하 왕연을 임시 지도자로 선택하고 먼저 왕자의 장례식을 그의 봉토에서 치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장례 행렬은 석륵에게 잡혀 닝핑 전투에서 패배했다. 황제군은 궤멸되었고, 단 한 명도 탈출하지 못해 관리와 병사들의 시체가 더미처럼 쌓였다. 북쪽의 주요 진나라 군대가 궤멸되면서 한나라 군대는 방비가 허술하고 기근에 시달리는 낙양으로 내려와 도시를 함락시키고 311년 7월 13일에 회제를 사로잡았다. 구희 또한 몽청현에서 석륵에게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 이 사건은 영가의 난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서진은 5년 더 존속했는데, 회제의 조카인 진 민제가 이끄는 황제 복위가 회제가 포로가 된 직후 장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또한 316년 말에 멸망했고, 사마 씨는 결국 남중국 건강에서 동진으로 재건되었다. 팔왕의 난에서 승리한 지 4년 만에 사마월은 여러 반란과 궁정 정치에 시달려 죽었다. 그의 죽음 5년 후, 장안과 낙양은 모두 함락되었고 북중국 대부분은 십육국으로 알려진 여러 단명 국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Chinese Civiliz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2]
서술
[3]
서적
China Between Empires: The Northern and Southern Dynasties
Harvard University Press
2011
[4]
서적
The Sinitic Encounter in Southeast China through the First Millennium CE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5
[5]
서적
The Jiankang Empire in Chinese and World History: Ethnic Identity and Political Culture
Oxford University Press
2020
[6]
웹사이트
East Asian History
http://www.eastasian[...]
1991-12-01
[7]
서술
[8]
서술
[9]
서적
Zizhi Tongjian
[10]
서적
Zizhi Tongjian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